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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범, 「무림의 은둔고수 나 김정배」

 

  마침내 무림이 세간에 관여하는 날이 찾아왔다

  그런데 나 김정배는 이미 죽고 없다


  무림의 은둔고수 나 김정배는 무림을 벗어나 강호를 견제하고 세간을 수호해왔다 나 김정배는 은둔고수 겸 은둔의 고수 내가 나임을 김정배임을 무림의 은둔고수임을 철저히 숨겨온 존재

  김정배는 김정배를 부정해야만
  실재할 수 있다

  무림의 은둔고수는 큰 책임이 뒤따르는 직책이다 나 김정배 책임감 빼면 시체인 사람 그러나 김정배는 몇 시간 전부터 시체에 불과하다

  나는 스승의 전언을 세간에 알리기 위해 대나무 숲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나 김정배가 지난 대나무 숲은 무림의 격전지 한가운데

  한순간
  무림의 은둔고수
  나
  김정배에게
  날아온 검을
  무림의 은둔고수도
  나도
  김정배도
  피하지 못했다

  유령이 있다는 걸 무림의 은둔고수 나 김정배도 몰랐다 나 김정배 유령이 됨으로써 유령의 존재를 알았다 더는 무림의 은둔고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람은 죽어도 사람일 줄 알았는데
  김정배 너무 오만했구나

  유령 김정배는 분해하며 협객들이 시체 김정배에게서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중에도 그것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어디에도 이런 모범적인 시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점이 무림의 은둔고수에게 퍽 어울리는 최후였기에

  협객들이 떠나고 유령 나 김정배는 무림의 은둔고수의 아무도 모르는 죽음이 일어난 자리에 오래간 남았다

  유령으로
  존재하는 일이
  왠지 너무 익숙했던
  한 때 무림의 은둔고수
  나 김정배는 때로
  내가 유령임을
  망각한 채

  시체 김정배를 들여다보았고 나의 편히 감긴 두 눈 그저 텅 빈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Q. Z세대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기분은?

  자취한 지 햇수로 6년째인데 자취의 사전적 의미를 최근에 알았다. 자취는 사실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을 뜻했다. 이제껏 당연히 혼자 산다는 뜻일 줄 알았다. 아무래도 내 자취생활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대체 언제부터 자취한 걸까. 어쩌다 난 내가 언제부터 자취한 지도 모르는 사람이 됐다.
  마찬가지로 나는 Z세대인데 내가 Z세대라는 사실을 잘 감각해내진 못하고 있다. 한자를 어른들에 비해 잘 못 읽을 때 내가 한자에 안 익숙한 세대라는 걸 느끼긴 한다. 근데 한자 잘 읽는 Z세대 사람들도 많겠지. 그럼 난 Z세대지만 Z세대를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걸까. 한자를 잘 알았으면 자취 뜻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어찌 됐건 나는 Z세대다. 아무튼 그렇다.


한재범

시를 쓰고 가끔 열심히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