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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서툰 번역의 기쁨>

「아이들의 이야기」 Louise Glück

아이들의 이야기, Louise Glück
 
시골에서 사는 게 지쳐, 왕과 여왕은 도시로 돌아온다
모든 작은 공주들은
달가닥거리는 차의 뒷좌석에서
있다는 것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나는, 너는, 그와 그녀, 그것은—
하지만 차 안에는
어떤 꽁쥬게종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누가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미래를 모르는데
별들마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공주들은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겠지
매일이 얼마나 슬픈 날들이 되었나
차 밖으로는 소들과 초원이 지나가고;
그들은 평온해보이지만 평온함은 진실이 아니다
절망은 진실이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는 것. 모든 희망을 잃고
우리는 잃어버린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또다시 희망을 찾고 싶어 한다면




3. 우리는 별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별들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몇 년 전에 시 수업을 들을 때였다. 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쓰여서 앞에서 뒤로 읽힌다고 시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시간은 앞에서 뒤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상상하면서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거꾸로 움직이기도 멈춰있기도 띄엄띄엄 떨어져있기도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글은 어색해진다. 우선 두 단어는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를 띄는 단어로 번역을 했을 때도 말이 가지고 있는 질감이나 뉘앙스가 바뀐다. 한 언어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이, 다른 언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일 때도 많다. 시를 번역한 뒤 ‘아이들의 이야기’의 다른 한국어 번역본을 읽을 수 있었는데 ‘planet’이 ‘행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번역과 다른 번역 모두에서 ‘planet’은 ‘별’이라고 번역되었다.
 
  내가 ‘꽁쥬게종’이라고 적은 단어 ‘conjugation’은 그 번역에서 아예 다른 문장으로 대체되었는데, ‘conjugation’이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착어인 한국어에는 conjugation이라고 불리는 동사변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학에서 conjugation을 번역할 때 사용하는 ‘활용형’이라는 말은 이 시 안에서 납득되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에 나는 완전히 이질적이지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단어를 쓰고자 ‘꽁쥬게종’이라는 불어 단어를 선택했다. 원작자를 고려하지 않은 번역자의 인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를 쓴 루이즈 글뤽은 미국의 시인이다) 하지만 불어는 ‘conjugation’의 활용이 도드라지는 대표적인 언어 중 하나고, ‘꽁쥬게종’이라는 단어를 선택해야지만 적극적인 독자로 하여금 다음 문장 역시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단어를 처음 본 사람은 무심코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꺼내 들어 찾아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언어는 언어마다 각자의 어순을 가지고 있고 이 역시도 번역에서의 부자연스러움, 혹은 번역투의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책에서 저자는 한국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풀어나갈 수 있는 어순을 가진 반면 영어는 중간중간 다시 문장의 맨 앞으로 돌아가 반추해야 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관계사가 발달해 문장을 수식하는 말들이 수식당하는 말의 뒤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어의 경우에는 이런 경향성이 더 심하다. 심지어 영어에서 형용사가 앞에 오는 반면 대부분의 불어에서 형용사는 수식하는 대상의 뒤에 위치한다.
 
  불어 원서를 독해하는 수업시간은 끈을 늘어뜨리며 미로 속을 걷거나 과자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숲을 헤매는 아이가 된 기분을 들게 했다. 교수님들은 수업 도중에는 불어 텍스트를 원어의 어순 그대로 해석하며 읽어주셨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냐면~” / “그런데 그 생각은 ~~였다.” 같은 표현들을 굉장히 자주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이렇게 장황하게 풀어낸 문장들은 원문에서는 단 하나의 긴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교수님들은 그 문장들을 쪼개고 분리시켜서 몇 번씩 되감아가며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오르는 사람처럼 어떤 언어에서의 문장은 흐름을 역행하며 독자로 하여금 뒤에서 앞으로, 그리고 다음 문장으로, 그리고 또다시 뒤에서 앞으로 문장을 읽어 내려가게 만든다. 두꺼운 책의 주석 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읽어나가다가 1), 2) 같은 숫자가 달린 단어를 발견하면 몇 페이지를 뒤로 넘겨서 주석을 확인한 뒤 다시 단어가 적힌 문장을 곱씹어 읽어보고 이해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첫 페이지에서의 마지막 페이지로 가는 것은 언어와 시간의 특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의심 없이 답습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색한 번역은 좋지 않은 번역인 걸까? 형용사가 명사 앞에 등장해 뒤의 문장을 수식하고, 이렇다 할 관계사가 없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순차적으로 읽힐 수 있는 언어가 한국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러움에 더 민감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어로 번역된 시는 어떤 시도 전보다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번역된 시는 원어로 쓰인 시보다 더 낯설다. 나는 쉬클롭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가 시 혹은 아름다움의 본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운 시는 부자연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시의 본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프루스트는 아름다운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고 얘기한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는 온전히 한국인일 수 없다. 영단어 ‘being’은 한국어 ‘존재’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 being은 existence가 아니기 때문이다. ‘being’은 ‘있는 것’이다. 동사가 명사가 되는 가장 원초적인 단어. ‘존재’와 달리 ‘있는 것’에는 행위가 있고 ‘existence’가 아닌 ‘being’이기 때문에 시인은 ‘conjugation’의 개념을 ‘나는, 너는, 그와 그녀, 그것은’이라는 나열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된다.
 
  별들과 시간이 함께 태어났다는 사실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아득히 먼 곳에서 별들은 확실한 물질로써 존재한다. 그들은 동시에 생겨났지만 루이즈 글뤽은 그들 역시도 서로를 모른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미래를 모른다는 말은, 미래의 불확실성임과 동시에 시간의 불확실성이다.
 
  시의 원제 ‘A Children’s Story‘는 동화를 의미한다. 원제의 아이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지만 ’아이들‘이라는 말이 쓰고 싶어서 그렇게 썼다. 동화와 현실이 다르듯이 왕과 여왕은 그저 차를 운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일 지도, 작은 공주님들은 부모가 아이를 부르는 호칭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동화가 되는 방식으로 아이들은 공주들이 되어버리고, 작은 가족이 차를 타고 도시로 떠나는 내용은 새로운 별을 따라 떠나는 왕과 여왕의 이야기로 변한다.
 
  차 밖으로는 소들과 초원이 지나가고 그들은 평온해보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지나가는 것들은 멈춰있는 것들이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당신이다. 내가 읽는 시인의 절망은 공주들이 공주가 아닐 수 있는 세계, 평온함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세계에 대한 비관이 아닌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틀릴 수 있음을 지적하는 가능성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선 잃어버린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식하는 문구를 쫓다가 앞줄의 문장으로 돌아가게 돼버리는 외국어처럼. 시의 원문에 별(star)이라는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가 살 수 있는 별을 쫓아 낡은 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공주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시간이 있다는 증명인 것 같고, 그들이 돌아온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목초지의 휑한 도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
 
  ‘모든 희망을 잃었다 / 진실은 절망이다’고 말하는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시는 별들의 슬픔을 담고 있고, 한 편의 시를 읽어내는 과정은 잃어버린 곳으로 돌아가는 가족의 여정 같다. 



Isaiah
‌ 
‌베를린 < SAND jourral >에서 데뷔
‌시를 쓰고 옷을 입습니다.


2021년 코로나19 예술지원 < ART MUST GO ON > 선정작
주최주관 : 한소리(아는사람)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