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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손목포착성건초염」

나중에 이곳을 파볼 사람을 위해 거인을 묻자

  차창에 반사된 빛은 거인이 흘리고 간 손톱을 닮았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두물머리를 향해 오래 걸었다


  나는 과도를 들고 걷다가
  이쪽 편이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무작위로 알록달록한 유리구슬을 꺼내자고 말하는 사람
  마디가 굵은 검은 손에 반지가 백 개 끼워져 있다


  파란 구슬 각진 구슬 산호색 구슬 개나리색 구슬
  일정한 순서와 규칙이 생기기 전에

  손목을 자른다

  잘린 손목이 백 개 들어 있는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았다; 강 건너편, 과수원, 멋진 곳, 좋은 곳, 아름다운 곳, 덜 아름다운 곳, 전혀 아름답지 않은 곳, 미추로 구분되지 않는 곳

  “강 건너 어둠 속에 과수원이 있습니다. 포도와 자두가 풍작이라는데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네요.”

  (지금은 낮인데요? 물어볼 새도 없이)

  그곳으로 가겠노라고 말하고 잠든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 소년의
  마지막 꿈속에서

  나는 손을 씻고 걷다가
  건너편이었다

  우리 여기에 있자
  아무데도 가지 말자
  속삭이는 사람이 있어서
  처음으로 여기가 어딘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백 개의 잘린 손목들은 주머니 속에서
  서로 악수하고 인사하고 체온을 재고 꿈틀거렸고

  이곳은 자꾸 넓어져서
  강도 생기고
  과수원도 생기고
  낙과도 생기고
  은쟁반도 생기고
  홍옥은 없고

  너 사과 깎기 싫어서 그러지?

  나중에 이곳을 파볼 사람을 위해
  거인을 묻자

  충분히 큰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가 묻힌 채로
  영원히 커지기로 했다

  주머니 속에 종이를 넣어 제비뽑기로

  내일 정할 예정이다


작가 소개

  김민식 (palinodia7@gmail.com)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

작가의 말

  확산시키고 돌아오지 않기. 그냥 여기에 있자. 그래 좋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 돌아온다. 마무리가 지어진다. 귀로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이것만이 내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쓴 게 아닌 것도 아니다. 일종의 불수의근 같다.

  「손목포착성건초염」의 제목을 짓기 위해 긴 시간 고민했다. 시의 제목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손목포착성건초염」, 「류마티스 관절염」, 「앙큼달콤문창한남브이로그」, 「인사이드 잡」, 「할머니 자주 못 뵈어서 죄송해요 이번 설엔 꼭 양평 놀러 갈게요」, 「회절 2」, 「모양막」. 나는 이 중에 「앙큼달콤문창한남브이로그」가 마음에 들었는데 (화자가 액션캠 들고 브이로그 하는 것 같아서) 친구들이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만 빼고 아무거나 하라고 했다. 지금의 제목이 최선인 것 같지만 다른 제목을 붙여서 읽어도 재미있는 것 같다.


2021년 코로나19 예술지원 < ART MUST GO ON > 선정작
주최주관 : 한소리(아는사람)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