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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없음」

김선오, 시집 『나이트 사커』가 있다.


  어떻게 거실 한가운데 벽이 솟아난 거지
  알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 우리는 볶음밥을 먹고 있었는데
  넷플릭스를 보며
  음식이 조금 남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벽을 둘러보는 너와
  사면에 가득한 흑백 사진들


  젊은 시절의 위노나 라이더 장국영 모니카 벨루치 알 파치노
  얼굴을 만져본다


  영화 이름을 대충 기억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람들 대부분 주연이었겠지
  본 적은 없어 아비정전도 대부도
  갑자기 집이 접힌다


  집은 앨범이 된다
  볶음밥 속 밥알들이 납작해진다
  우리는 이 페이지와 저 페이지를 건너다니며
  거실에 걸어둔 우리의 결혼사진이
  사진 속 사진이 된 모습을 본다


  끝없는 사막 위에 어떻게 드럼세탁기가 놓여 있는지
  모니카 벨루치가 입은 티셔츠에 왜 우리 강아지가 프린트되어 있는지
  장국영이 어째서 관능적인 자세로 이케아 소파 위에 누워 있는지


  네가 한때 배우를 꿈꿨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영향이라기에 이건 너무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그치
  너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다


  이 사람들 몇 살이야
  지금 죽었어 살았어


  너는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한다


  장국영이 소파에서 일어난다
  너의 핸드폰을 손으로 잡고
  아니야, 찾아보지 마, 말하며 웃는다


  러닝셔츠 차림의
  그와 술을 한잔하기로 한다
  위노나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저번 달에 술을 끊었다고 한다
  아기처럼 잠든 알 파치노


  우리에게는 담금주가 많아
  나의 오랜 취미야
  귤은 코리안 탠저린이야


  귤주를 마신 장국영이 춤을 춘다
  늦었지만 너희들의 결혼을 축하해
  나와 너의 손등에 그가 입을 맞춘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 집의 마지막 장에 도착할 때쯤
  우리는 모두 취해 있다


  귤주를 쏟아서 발 디딜 곳이 없다


  기억이 안 나
  우리 몇 살이었지
  검색해보자


  핸드폰 좀 줘 봐


  꺼진 텔레비전 앞에서
  너와 백발의 장국영이 곤히 자고 있다





작가의 말


나에게는 ‘장국영 세트’가 있다.

영화 < 아비정전 > 속 장국영이 맘보를 추던 장면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흰색 러닝셔츠와 트렁크인데
한여름에 집에서 주로 입는다.
위아래로 총 세 벌이 있다.
그렇게 입은 스스로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들지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막 없음’을 완성한 후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 찬실이는 복도 많지 >라는 영화에서도
장국영 귀신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 속 장국영 귀신 역시 ‘장국영 세트’를 입고 있었다.

곧 여름이다.
나는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더위를 잘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