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펜트 하우스>를 중심으로
소설에 기승전결이 있고, 시조에 초장ㆍ중장ㆍ종장이 있듯이 막장드라마의 전개에도 세 가지의 법칙이 존재한다. 가장 흔한 전개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바람으로 인한 배신이다. 두 번째는 시어머니나 새어머니의 괴롭힘이고, 마지막은 자식의 죽음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는 본 적이 없으며 지금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들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서사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바람, 배신, 죽음으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 각자 더 새롭고, 잔인하며 획기적인 복수 방법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나는 미취학 아동이던 2002년부터 엄마와 함께 < 겨울연가 >를 시청하며 다음 화를 하루하루 기다리던 애청자였다. 막장드라마하면 빠지지 않는 < 인어 아가씨 >, < 아내의 유혹 >부터, < 겨울연가 >, < 내 이름은 김삼순 >, < 베토벤 바이러스 >처럼 그 당시 붐을 일으켰던 작품의 시청자였고 최근 몇 년간은 < SKY캐슬 >, < 부부의 세계 >, < 펜트하우스 >까지 굵직한 작품들은 죄다 빠뜨리지 않고 보았다. 사실 드라마 광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떠올려보면 가벼운 오타쿠쯤은 됐던 것 같다.
예전에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현실에서 겪고 있던 힘듦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저 인물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몇 화에 걸쳐 진행되는 사건의 결말-보통은 얘네 둘은 만나게 되는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지 같은 거였다-이 궁금해서 그걸 기다리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보다 오히려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또 많은 사건이 사라지는 요즘의 드라마는 어쩐지 다소 피로하게 느껴진다. 물론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 덕분에 이어서 시청하고 있기는 하지만,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드라마의 전개보다는 특정 인물의 악행이나 복수 방식이 궁금한 데에서 멈추게 되었다. 그 방식이 개연성이 없고 폭력적이라도 말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드라마를 접하다 보니 극 중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마라 맛 막장’에 취해 ‘다음에는 누가 죽을까? 어떻게 복수할까?’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건 단순히 다음 화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궁금증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바로 공감 감각의 부재다.
드라마 < 부부의 세계 >
막장드라마에서 특히나 돋보이는 점은 ‘빠르고 직관적인 전개’이다. 몇 화 만에 재산을 죄다 몰수당해 주인공을 괴롭혔던 시가가 주인공이 살았던 좁은 집으로 옮겨가고 (아내의 유혹), 바람이 나서 고향을 떠난 부부가 1회 만에 천만 영화의 후광을 업고 고향에 돌아와 주인공을 자극하고 (부부의 세계), 저렴하게 구매한 집이 재개발 지역으로 구획돼 인생 역전 (펜트하우스)을 하게 된다.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복수와 악행의 방법도 진화한다. 서류 조작에서 흉기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감금에서 생매장 시도로, 단순 구타에서 맥주를 뿌린 차에 감금시킨 뒤 불을 붙이려다가 미수에 그친다.
소위 ‘사이다와 고구마 전개’로, 막장드라마는 이에 따른 인과응보가 확실하다. 죄지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 시청자는 악한 일을 저지른 인물이 2회도 지나지 않아 응징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좀 더 고구마를 주고 강한 사이다를 주고 싶다면 좀 더 상황을 꼬이게 만든 뒤에 해결한다. ‘나쁜 사이다’도 있다.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 한 행동을 시청자들이 믿도록 만든 뒤 ‘사실은 더 나쁜 일을 저지르기 위한 수단’으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스피드하게 진행되는 전개를 보면 자연스럽게 ‘사이다 썰’이 떠오른다.
화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사이다’나 ‘참교육’을 들며 ‘후기’를 찾기 마련이다. 그 일에 대한 토론을 벌이면서 대부분은 맥락 등을 보지 않은 채 그 일을 (당)한 사람의 후기를 기다린다. 사이다로 여겨지는 후기들은 대부분 고소나 해고와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과연 이러한 후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화제에 공감하기 때문일까? 그 썰을 소비하며 생기는 것은 ‘내 편’, ‘네 편’이고 처음에 썰을 쓴 서술자의 의견이 사실이 아니게 되면 여론에 따라 서술자를 응징한다. 혹은 서술자의 말이 사실이 되거나 여론을 지배하면 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응징을 당한다. 썰은 보통 앞뒤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커다란 중심사건을 늘어놓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이럴 때 사람들은 공감이나 이해보다는 판단과 평가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는 지금 방영되고 있는 막장 드라마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서사에는 개연성이 부재하고 인물들은 당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결국 공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을 그저 ‘보는 수밖에’ 없다. 제정신인 인물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고, 저 인물들을 이해시켜줄 수 있는 서사가 부실하기 때문에. 작품의 서사가 마치 힘을 잃는 시점이고 사이다 썰과 마찬가지로 ‘후기-다음 전개-를 위한 배출구’가 되는 순간이다.
개인이 겪는 고부갈등, 사랑 이야기가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의 레퍼토리라면, 지금 유행하는 드라마는 대학과 아파트, 기업승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유튜브에는 < 서울대 의대 간 사람이 말하는 스카이캐슬 >, < 음대 다니는 사람이 본 펜트하우스 >라는 주제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이제 타인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된 것만 같다. 한국인이라면 드라마를 대충 보고서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은 더 세밀해졌고 더 대담해진다. 누가 더 재화를 차지하는지, 누가 더 계층상승에 가까워지는지가 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주된 테마로 작용한다. 이것은 곧 개인 간의 일에서 사회적인 맥락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직조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 사람들이 마음껏 참견할 수 있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주제가 곧 드라마의 핵심주제가 된 것이다.
드라마 < 펜트하우스 >
드라마 < 펜트하우스 >는 첫 화부터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한 중학생이 고층에서 1층에 있는 여신상의 손 위로 추락하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방식으로 1화를 시작한다. 2화부터는 미성년자 집단폭력을 과도하리만치 상세하게 그려주어 방통위의 주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성 논란을 뒤로하고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마지막 화에는 28.8%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즌 1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시즌 2를 이어나가고 있다.
펜트하우스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인 헤라팰리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드라마다. 서울대 음대를 가고 싶어 하는-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아이들과, 최상층인 펜트하우스에 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디서 많이 본 소재 같지 않은가? 19년도 초까지 방영한 < SKY캐슬 >과 비슷한 포맷이다. 똑같이 서울대 진학에 목표를 두고 있는 부모와 아이들이 나오고, 그들만의 주거타운인 ‘스카이캐슬’에서 특권 의식을 누리며 살아간다. 일종의 ‘교육 공동체 집단’인 것이다. 이들의 세계에서 교육이란 ‘부모의 명예와 부를 안정적으로 증여해줄 수 있는 사다리’고 주거공간은 ‘같은 의식을 가지고 모인 동지이자 라이벌 집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로만 드라마를 구성한다면 극적인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부유한 계층의 부모와 아이들이 나와 그들만의 사회를 꾸리는 드라마를 누가 보겠는가? 기껏해야 고전적인 풍자극이 되어 브라운관에서 그다지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의 공동체 의식에 혼란을 줄 만한 존재를 등장시켜야 한다. SKY캐슬에서는 ‘김혜나’고, 펜트하우스에서는 ‘배로나,’ ‘민설아’가 그렇다. 이들은 대치동을 밤낮같이 오가는 주인공의 자식들보다도 더 높은 성적과 능력-김혜나는 강예서를 재치고 전교 1등을 하고, 민설아는 청아 예고를 수석으로 입학하며 배로나는 청아 예술제에서 1등을 한다-을 인정받고, 결국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이들은 드라마 속 세계관에 반기를 드는 인물이다. 주거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고 교육 공동체에도 속해있지 않지만, 그들과 흡사한 욕망을 보인다. 펜트하우스에서 주석경과 하은별이 부모에 의해 강요된 성악을 하고 있다면, 배로나와 민설아는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청아 예고 입시에 도전해 성과를 낼 만큼 주체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다. 가난하지만 욕망을 가지고 있는, ‘오를 수 없는 사다리’에 오르려고 하는 인물들이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이러니한 전개지만, 이것은 뒤에서 조금 더 다루고자 한다.
어쨌거나 이들은 ‘감정의 배출구’의 역할로 자리하게 된다. 사건의 전개를 위해 희생당하거나 자본주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배출구. 혹은 주인공이나 악역에게 어퍼컷을 날릴 수 있는 ‘해소’의 역할로, 가끔은 시청자들에게 ‘저 재수 없는 금수저를 이기는’, 즉 대리만족을 시켜줄 수 있는 하나의 ‘유희’가 되는 것이다.
“이런다고 내가 널 받아들일 것 같니?
우리 착한 은별이가 너한테 물들었을까봐 소름끼치고 끔찍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불결하다고!
하필 가정교육도 못 받은 애랑 엮여서…….”
“저도 은별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제가 무슨 병이라도 옮겼나요?
어머니 딸만 소중한 건 아니잖아요.”
“감히 누구랑 비교를 해?
너 같은 근본 없는 고아가 내 귀한 딸이랑 같다고?”
< 펜트하우스 I > 3화 中
< 펜트하우스 >에서 등장하는 ‘부의 서사’
펜트하우스는 부자들도 결국 일반 서민들과 비슷하다, 혹은 상류층들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풍자하기 위한다는 주제 의식을 지니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는 이전에 작가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단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라는 명제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부자들 또한 돈에서 자유롭지 않고, 돈에 사로잡혀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돈을 보고 사람들 깔본다. 천서진은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지만 청아 재단 이사장이 되기 위해 아버지가 죽어가는 데도 도망을 가고, 하은별과 주석경 무리는 자신들과 급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민설아와 배로나를 잔혹한 방식으로 괴롭힌다. 주단태는 펜트하우스를 소유하고 있고 한 기업의 회장이지만 또 하나의 건물을 세우기 위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다. 이 인물들의 당위성은 결국 부를 축적하는 것이고 결과도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이 돈을 벌기 위해서 벌어진다. 복수하는 당사자들도 결국 돈이 있어야 ‘돈 내 나는 복수’가 가능하다. 오윤희가 가난했을 때는 선했지만, 헤라팰리스라는 재화를 얻으면서부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택할 수 있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사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내는 당위성도 간단하다. 배로나와 민설아처럼 부유하지 않지만 부유한 인물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인물들을 출연시키는 것이다. 민설아는 새로운 가족에게 골수이식을 해주고는 버림받는다. 한국에서는 과외를 하다가 출신과 나이를 속였다는 이유로 괴롭힘당하다가 죽고, 배로나는 1위를 가로챘다고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희생되는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결국 부자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려는 드라마가 돈이 없지만, 주체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을 죽인 뒤 ‘배출구’이자 기폭제로 사용하여 ‘부의 서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돈이 있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라는 참이면서도 참인 것을 인정하기 싫은 명제가 곧 드라마의 주제이며, 모든 서사를 가능케 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클립을 끼운 서사
드라마 담론에서는 클 영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유튜브를 보면 수많은 클립 영상들을 볼 수 있다. K-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댓글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영상이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조회 수와 댓글 수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앞선 글에서 한국인이라면 드라마를 대충 보고서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썼는데, 클립 영상 문화가 드라마의 서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과한 추측이 아닐 것이다.
클립 영상은 그 드라마의 본방송을 챙겨보지 않는 사람도 클릭해보는 경우가 많다. 유튜브를 하다 보면 알고리즘에 이끌려 보게 될 때도 있고, 심심할 때 틀어놓으면 시간이 잘 가기도 한다. 한 회를 20분가량으로 편집하여 스토리를 보여주는 클립 영상을 제외하고는 보통 앞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게끔 편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서사를 보여주기보다는 사건을 보여주어 흥미를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클립 영상이 단순히 예고편이나 흥미를 끄는 기능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짧은 드라마로 기능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5분에서 7분 정도 되는 영상에서 조회 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직관적인 내용이 담겨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필수 불가결하게 본 드라마 속의 사건들 또한 자극적이며 직관적인 짧은 사건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염두하고 서사를 꾸리면 인물의 행위를 실행하기까지의 과정, 즉 이음새로 작용하는 ‘당위성’이 삭제된다. 시간이 없으니까.
“엄마가 내 엄마인 게 쪽팔리다고. 엄만 자존심도 없어?
어떻게 로나 엄마를 쉐도우 싱어로 세워?
고등학교 때도 엄마가 진거지? 그래서 목을 그은 거고.
그런 주제에 어떻게 나한테 배로나를 이기라고
그렇게 난리를 쳐! 엄마 열등감을 왜 나한테 풀어.
앞으로 나한테 명령하지 마.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잘난 체도 하지 마.
역겨우니까.”
< 펜트하우스 II > 7화 中
이러한 결과 끝에 보이는 것은 폭력 재생산이다. 당위 없이 계속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는 힘없는 서사의 되풀이처럼, 인물들은 폭력을 당하고 계속 폭력을 재생산해낸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적인 장면들이 여과 없이 방영되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심수련이 복수를 위해 모두를 버스에 가두어 불을 지르고 나중에는 진흙 속을 기어 나오게 만드는 장면은 ‘예고한 것에 비해 좀 아쉽다’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인물들 사이에서 폭력에 대한 감수성, 다시 말해 인물에 대한 공감 감각은 유실되고 만다.
물론 어떤 시청자는 드라마를 그저 유희로 소비할 뿐 작품성이나 서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비평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드라마를 즐겨보는 입장이라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의견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적대하며 부를 비축하려는, 그런 적나라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주제가 되는 드라마가 최근 들어 무척 많아졌다. 집단폭행에 대한 자세한 묘사, 여성에 대한 폭력, 미성년자에 대한 폭력과 강요를 어떤 드라마에서나 쉽게 볼 수 있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당하면 당할수록 화제성은 높아진다. 누가 더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냐를 다투기라도 하는 것처럼 편집이나 구도, 도구 또한 더욱 정교해져만 간다.
서사가 약화한다는 것은 해석의 범위를 줄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죽는다고 가정했을 때, 그 인물이 죽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보고 듣고 사유한다. 어떤 시청자는 ‘이래서 죽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시청자는 ‘죽이는 것보다 이런 방법으로 살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잃은 서사에서는 당위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왜’는 없고 ‘어떻게’만 있어서 이러한 사유를 약화하고, 종내에는 욕을 할 수 있는 ‘배출구’를 만들어주는 데에 그친다.
영어에 consider라는 단어가 있다. 동사로 읽으면 ‘사려하다’라는 뜻인데, 타동사로 사용하면 ‘자세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작품을 자세히 바라본다. 자세히 바라본다는 것은 곧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사려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들이 모여 인간 유형을 사려하고 공감하는 것이, 인간을 넓게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유가 약화한다는 것은 인간 유형을 탐구하고 인간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 수치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인 독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이며, 이러한 독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제작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건을 ‘look’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결국은 사건과 사건의 이음새가 부실해지고 사건-사건만이 남아 당위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이 누가 어떤 짓을 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마라 맛 막장’을 더 이상 그만 보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사려해서 볼만한 서사를 만들어주는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닐까. 언제까지 즐거운 저녁을 욕만 하며 보낼 수는 없으니까.
팀 소동 청비
감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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