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LIST
PREV NEXT
북쪽 세계의 끝에서 온 보따리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고


한글 중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는 무엇일까? 한때 SNS상에서 떠돌던 질문이다. 사람들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로 ‘응’을 꼽았는데, ‘응’이라는 단어 뒤에 어떤 기호가 붙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책 번역가들과 영상물 번역가들이 ‘응’의 의미를 번역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응’ 뒤에 마침표가 붙으면 대개 영어로 yes나 sure와 같이 알겠다는 의미─맥락에 따라 no로 해석되기도 한다.─로 사용되지만, 물음표나 느낌표가 붙으면 huh, well, will you, hey, pardon me 등 전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응’은 발화자의 말하는 방식과 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해서(응, 응, 응 등),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렇듯 ‘단어’는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 따라, 말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단어, 아주 단순해 보이는 단어 하나 속에 무수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시끄럽다고. 다음 말은 겨우 삼켰다. 하지만 뱉으려고 했던 말을 한두운은 들은 것 같다.”
―정용준, 「선릉 산책」,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122p

“조용히 좀 해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했다.”
―정용준, 「선릉 산책」,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128p

“어떤 말은 몸피가 너무 커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아무리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부지런히 놀려도 
말은 입안에 꽉 끼어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아. (…)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말이 
왜 입술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걸까.”

―정용준, 「떠떠떠, 떠」, 『가나』, 문학과지성사, 20p


이번 텍스트에서 다룰 정용준 소설가의 장편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용준 소설가는 「선릉 산책」이나 「떠떠떠, 떠」 등 이전 소설에서부터 꾸준히 ‘말’에 대한 사유를 줄곧 이어왔다.


어떤 말은 목구멍에서 걸려버리고 어떤 말은 내뱉으려 할수록 의미가 미끄러진다. 어떤 말은 삼켜내지만 어떤 말은 쏟아져 나오며 또 어떤 말은 언어가 아닌 형태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혹자는 말을 함으로써 세상과 소통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용준 소설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나는 이번 텍스트를 통해 정용준 소설가와 작품 속 인물들이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는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름이 있다. 물건도 이름이 있다. 나도 이름이 있다.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더듬이라고 부르면 나는 더듬이고,
병신이라고 부르면 나는 병신이 된다.
엄마는 나를 불쌍한 새끼라고 부르고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내가 불쌍해서 미칠 것 같다. (…)
왜 이름은 하나여야 할까.
버스를 꼭 버스라고만 불러야 하는 걸까.

─116p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이름이 없다─있을 테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서술자는 ‘더듬이’가 되었다가 ‘불쌍한 새끼’가 되었다가 ‘무연’이 되었다가 ‘우주’가 된다. 서술자가 다니는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말하길 거부하는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겉으로는 말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서 왜 다니는지 모를 사람들도 이곳에 다니고 있다. 언어 교정원 원장은 그들이 어려워하는 단어를 각자 노트에 적게 한 뒤 그중 하나를 이름으로 붙여준다.


그들에게 단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두 번째,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가령 ‘무연’이라는 단어는 “아무 인연이나 연고가 없음”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하고 있지만, 서술자에게 ‘무연’이라는 단어는 그가 다니고 있는 ‘무연 중학교’에서의 힘든 생활을 떠오르게 만드는 단어이다.


세 번째, 의미가 있었으나 사라진 단어.

그들은 서로를 두 번째, 개인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로 부른다. ‘무연’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번씩 불리다 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의미가 어느새 희석되고 소거된다.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단어가 비로소 아무런 의미 없는 단어 a, 단어 b가 되는 것이다.


“작은 바늘이 1에 있으면 한 시. 2에 있으면 두 시야. 
그런데 긴 바늘이 1에 있으면 5분이야. 
어릴 때 난 작은 바늘은 대충 이해됐는데 
긴 바늘이 이해가 안 됐어. 왜 1인데 5지? 
그리고 왜 시는 한 시 두 시 세 시 네 시라고 하면서 
분은 1분 2분 3분 4분이라고 하는 거지? 
넌 이게 이해가 돼? 
왜 한 시 한 분이라고 하거나 1시 1분이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헷갈리게 사용하는 거냐고. 
이 복잡한 법칙을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걸까?”

─96p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규칙들은 누가 만든 것일까? 서술자는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 질문을 품는다. 그리하여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쓴다. 사과를 애플(apple)이라고 부르고 데스크(desk)를 책상(冊床)이라고 부르고 ‘사랑해’를 전 세계의 말로 번역할 수 있다는 언어의 거대한 약속 위에 올려진 얇은 천막을 걷어내며, 동시에 이 언어의 껍데기들을 진짜 제대로 알고 쓰는 게 맞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서는 그들만의 언어적 약속 체계를 만들어낸다. 누군가 그들을 ‘불쌍한 새끼’라고 불렀을 때, 그들이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들의 방식은 타자가 멋대로 지칭한 단어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려고 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감싼 무수한 겹의 천막을 걷어낸다. 마치 껍데기를 부수고 나오는 ‘파피용(papillon) ( * 정용준 소설가의 「선릉 산책」에서 서술자의 별명으로 사용된 단어. 프랑스어로 나비를 뜻한다. )’처럼 말이다. 번역이 어떤 단어나 문장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라면,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는 바로 개개인의 이름이 아닐까.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북쪽 세계의 끝, 얼음의 나라가 있었어. 
그곳은 녹지 않는 얼음산과 
뾰족한 나무가 가득한 숲,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이 있는 차가운 겨울의 세계였지. 
얼마나 추웠냐면 말을 하면 말조차 얼어붙을 정도였어. 
사람들이 말을 하면 눈앞에서 말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후드득 떨어졌단다. (…) 
전령은 얼음을 뜨거운 물이 담긴 통에 집어넣었어.
 (…)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야. 
도저히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무서운 괴물의 울음 같은 소리만 들렸지
(…)
나는 겉으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가 좋았다. 

뜨거운 물에 녹아 되살아나는 말이 신비롭고 재밌었다.”

─23~25P


남극에 사는 새끼 펭귄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얼마나 똑같이 생겼냐 하면, 추위 속에서 먹이를 구해 온 아빠 펭귄이 새끼를 알아볼 수가 없어 무려 2천 마리의 펭귄 무리를 돌아다니며 새끼를 찾아다닌다. 아빠 펭귄은 새끼라고 생각되는 펭귄을 무리에서 불러내어 판별한다. 새끼 펭귄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울음소리를 듣는 것. 추위를 피해 무리에 섞여 있던 새끼 펭귄은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몸 안쪽,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울음소리를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서술자가 글로써 감정이나 생각을 표출해낸다는 것이다. 서술자는 그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 그리고 독자는 서술자의 ‘글’을 통해 한 세계와 소통한다. 사회가 규정한 소통의 방식을 익히는 대신,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몇 겹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정용준 작가가 소설의 밖에서 쓴 소설이기도 하고 서술자가 말하는 소설 속의 현실이기도 하며 그 현실 속에서 쓴 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선 사람들이 그의 일기를 읽고, 작가는 서술자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이곳에 글을 쓴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액자 속에 또 다른 액자를 보는 것처럼, 거울을 맞댄 것처럼. 이상하다. 마치 입을 ‘아’하고 벌리고 있는 목구멍 같지 않은가.

이상하게 편한 사람.
더듬는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더듬어.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듬는 모습 그대로도 괜찮으니까. (…)
그리고……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75p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모인 사람들은 얼음에 갇힌 말들을 함께 녹인다. 그들에게 봄이 온다. 녹아 되살아난 말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우리는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을 밟고 서 있다. 처음엔 아프고 차갑다가도 이내 파편은 녹아 발밑에 고여버린다. 언어는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온기에 닿아야만 의미화된다. 그러니 세계가 소통하는 방식은 늘 상호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이야기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래서 발밑이 아주 잠깐 젖는 기분이었다면,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마주 보며 선 것이 아닐까.

팀 소동 나아

나아가는 중입니다.
noizyarea00@gmail.com